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문단 편집) == 평가 == 일반적으로 크라수스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 우선 그 최후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카르헤 전투]]가 [[로마 공화국|로마 공화정]] 시대의 가장 치욕적인 패전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 돈 욕심이 많았으며 인격이 영 그랬던 것도 욕먹기 딱 좋은 거리다. 그러나 크라수스에 대한 이런 평가는 너무 박한 감이 있다. 당시 역사 기록에서는 크라수스를 단순한 졸부로 평가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그는 로마 공공을 위해 많은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물론 당시 로마의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기 위해 자비로 공공사업을 벌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 후 로마에서 벌인 대규모 행사에서 재산의 10분의 1을 썼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쓸 땐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로마 정계에서 그 무게감이 대단하고 위엄 있는 인물로 묘사했다. 군사적인 재능이 취약해 말로가 비참하긴 했어도 그것만으로 지금 같은 박한 평가를 내리기엔 무리가 있다. 또한 돈 욕심과는 별개로 의외로 사생활은 상당히 검소하고 깔끔하였다. 각종 공공사업에 많은 돈을 쓴 것과는 달리 개인적인 사치는 재산의 규모에 비하면 크게 부리지도 않았으며, 여자 관계가 지극히 화려한 카이사르와는 달리 본부인에게만 충실했다. 크라수스가 그렇게 부족한 인물이었다면 아예 삼두의 일인으로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는 후대의 2차 삼두정치 때 비슷하게 일찍 권좌에서 밀려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레피두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삼두에 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실력과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삼두정치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말은 곧 수십 명의 원로, 수백명의 로마 유력자 중 최정상의 위치를 가진 3인 중 하나였다는 뜻이니 결국 정치, 재력 어느 면에서나 최정상을 차지한 인물이었던것은 확실하다. 결국 삼두정치란 정치동맹을 뛰어넘어 3명의 로마 최고 권력자란 뜻으로 사실상 로마는 3명의 왕을 모시게 된거나 다름없었다. 현대의 기준으로도 그리고 당시 시각으로도 크라수스는 재계를 대표했던 인물로 당시 기록에도 크라수스는 소위 '기사' 계급, 즉 자산가 계급을 확실히 통제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가 (고위층 자제들이 큰 빚을 지는 게 일상화되던 시절에서도) 막대한 수준의 빚에 허덕일 때 그 빚 모두를 보증섰던 것이 크라수스고 본인부터가 최대의 채권자였다. [[갈리아 전쟁]]으로 카이사르가 독립하기 전까지 카이사르를 막후에서 조정한 것은 크라수스였다는 것이 당대 사람들의, 또 후대 역사가들의 평가이다.[* 물론 카이사르의 정치적 능력을 생각해보면 무작정 크라수스의 꼭두각시 노릇만 했을 리는 없었을 테니 두 사람의 진짜 관계는 서로 돕는 공생관계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크라수스가 뒤를 봐주고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에게 유리한 법안을 상정하는 관계. 물론 이후 카이사르가 군공을 세우면서 크라수스를 능가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크라수스도 군공을 세우러 갔다가...] 삼두정치에 참여한 직접적인 이유도 당시 새로 편입된 동방 속주의 [[징세청부업자|징세 업무를 맡았던]] 기사 계급[* 로마는 세금 징수권을 경매에 붙였다. 높은 징세액을 적은 사람이 징세권을 얻는 방식. [[징세청부업자]] 문서 참조. 당시의 동방 속주는 혼란이 계속되면서 처음 약속한 세금을 납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서도 해마다 8명만이 뽑히는 법무관이 된다는 것은 시민들의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개중에서도 크라수스는 수석 법무관이었다. 거기다 당시 최전성기를 맞아 로마 최고의 장군이란 평가를 받으며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폼페이우스의 유일한 대항마로 여겨질 만큼 로마 정계의 거물이었다. 직위나 경력이 더 높은 인물이야 원로원에 드글드글했지만 이미 당대 최고의 유력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두 사람으로 압축됐고 원로원이 이들을 견제하는데 골몰했던 걸 감안하면 크라수스의 정치적 위상을 알 수 있다. 물론, 술라 시대에 재산을 배로 불리고 스파르타쿠스 진압 당시 보였던 여러 비인간적인 행태를 간과할 수는 없다. 분명 능력 면에서는[* 특히 정치적 능력. 폼페이우스의 상승세를 이용하여 그와 정치적 동맹을 결성하거나 카이사르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투자를 하는 등 정치적 감각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 재평가를 받을 만하지만 그가 지닌 인격적인 결함은 충분히 비난받을 만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군사적 재능의 부족과 그에 따른 미비한 군공이 끝까지 크라수스의 발목을 잡았다. 고대 로마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을 정복하며 성장한 정복 국가였으며 시민 대다수는 참전 경력이 있거나 곧 참전할 예비군이었기에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군대와 군사적 업적을 대단히 중시하는 사회였다. 군사적 재능과 공적이 부족한 사람이 최고위에 오르기가 대단히 힘든,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사회구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키케로]]가 괜히 유명한 장군 출신이 아님에도 [[집정관]]이 됐음을 자랑한 게 아니다. 그런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키케로]]도 본인이 짬밥이 안 맞는다고 금방 때려치웠지만 참전 경력도 있고, 군사 호민관을 지냈던 군필자였다. 거기에 당시 로마 공화정이 겪던 극심한 대내외적 혼란 덕에 유력 정치인의 군사적 공적이나 능력이 더더욱 중시되고 또 필요해진 상태이기도 했다.]다 보니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이루어낸 역사적 위업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군 경력은 크라수스에겐 거대한 벽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마리우스 - 술라의 시절을 거치면서 최후의 수단으로 사병을 동원한 쿠데타가 공공연히 자행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적인 사병의 규모와 군사적 재능의 유무가 최고권력을 얻느냐 못 얻느냐를 가르는 조건이 되는 시절[* 이걸 못 해서 망한 대표적 케이스가 마리우스 사후 로마를 통치했던 킨나다. 술라 사후 술라 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여러 마리우스파들도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술라파 장군들을 이기지 못해 끝장이 났다. 카이사르 - 폼페이우스의 분쟁만으로 이 시기의 로마를 내전기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이 오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업적과 능력에 대한 크라수스의 부담감은 더 늘어났을테고 실제로도 삼두정치가 진행될수록 크라수스의 위치는 점차적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보다 한 단계 낮아진 이 둘의 조율자 정도로 내려가 있었다.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강행했을 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이를 결국 승인해주긴 했어도 두 사람 다 크라수스의 만용에 가까운 행동에 크게 놀랐고 지휘관급 인재와 병력을 더해줄 정도로 크라수스의 원정에 불안감을 가졌다. 이는 두 사람 모두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이 빈약함을 알았기 때문인데 그 이유로 이 두 사람은 크라수스가 현실에 안주하며 자기들의 완충지대 역할 정도에 머물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크라수스의 야망은 이 둘의 밑에서 양자를 조율하는 수준에서 머물 정도로 작은 것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이를 한 번에 만회하기 위한 파르티아 원정을 강행했다가 본인 능력의 한계로 비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결국 크라수스의 사망으로 완충지대가 사라져버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곧 서로 대립하게 됐고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전면전이 시작되게 된다. 만약 크라수스가 무리한 군사적 원정을 떠나지 않고 생존하여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을 주는 막후 2인자나 3인자 위치를 끝까지 유지했다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립이 일어나지 않았거나, 견제를 의식해 작은 충돌에서 끝나고 로마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는 역사가들의 의견들도 있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제거하고 종신독재관이 된 과정, 카이사르 사후에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까지 오르게 된 역사배경을 생각해본다면, 만약 제 3세력인 크라수스의 견제가 있을 경우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는 요소이다. 크라수스는 단독으로 원로원을 견제하거나 움직일 수 있는 막강한 인물 중 하나였고,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사망하고 인연이 끊긴 시기부터 폼페이우스가 원로원파에 접근하기 시작한 점을 고려한다면, 크라수스가 계속 생존했을 경우 폼페이우스의 독주와 원로원 장악 시도에 제동을 걸어 삼두정치가 그대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파르티아 원정인 [[카르헤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패전하면서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까지 전사하여,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조율할 수 있던 핵심인물이 줄어들어 버린 것도 크다. 푸블리우스는 단순한 아들 역할이 아니라 카이사르 휘하에서 갈리아 전쟁을 치렀던 군단장으로도 활약했다. 게다가 카이사르가 '젊은 크라수스'라고 부르고 신뢰하는 인물로 직접 '갈리아 전기'에 언급했을 정도로 총애를 받은 인물이다. 푸블리우스는 삼두정치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크라수스와 카이사르 쪽에 무력을 더해주고, 또한 카이사르와 크라수스 사이의 마찰을 줄여주며 폼페이우스를 견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무리한 크라수스의 원정에 말려들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의 인물 평가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는 '''"어떻게 죽었는가"'''였다. 설령 패배해서 죽었다 하더라도 로마인답게 전장에서 당당히 죽었다면 대체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런 로마인들의 인물 평가의 가장 확실한 사례가 바로 [[소 카토]]이다. 생전에는 일반 로마 시민과 반대 노선인 옵티무스파의 거물로 존재감을 발휘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 민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하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에게 반기를 들고 싸우다 패배한 후, 의관을 정제한 뒤 [[플라톤]]의 저서를 읽다 배를 가르는 극도로 강렬한 방식의 자살을 선택하면서 당대 로마 시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많은 로마 시민들은 [[소 카토]]의 자살을 '''장렬한 죽음'''으로 여기고 생전과 달리 동정과 지지를 보냈는데, 그 수준은 [[카이사르]]가 직접 [[소 카토]]의 주장과 자살 선택을 반박하는 글을 대중에게 발표했어야 할 정도로 강렬했다.][* 후일의 데키우스 황제와 그의 아들 에트루스쿠스도 로마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고트족과의 전쟁에서 그들이 오판으로 패배하고 부대가 전멸하긴 했지만 패전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다는 점을 로마인들은 더 높게 평가했다. 오죽하면 그란데 루도비시라 하여 부조를 만들어서 기념했을 정도.] 하지만 크라수스의 죽음은 그런 장렬한 최후와는 거리가 멀었고, 이것이 사후 크라수스의 평판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만약 그가 만용을 부리지 않고, [[존버]]를 하면서 계속 막후 정치인 스타일로 남았다면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살아남아 원로로 존경받았을지도 모른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매우 총애한데다 크라수스와도 서로 사이가 좋았다. 폼페이우스라면 몰라도 카이사르가 딱히 크라수스를 견제한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파르티아 원정에 금쪽같은 갈리아 기병까지 붙여줄 정도였다.[* 비슷한 예로 다테 마사무네가 있다. 그는 천하를 노릴 정도로 거물급 다이묘였지만 도쿠가와 가가 천하를 먼저 잡게 되자 자신이 이를 뒤집을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도쿠가와 가의 지배에 협력해서 크게 대접받았다.] 때문에 카이사르 암살 후에도 살았다고 가정할 경우, 크라수스는 옥타비아누스 역시 지지했을 것이고[* 자금과 세력이 필요했던 옥타비아누스 역시 마찬가지다. 옥타비아누스는 한때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때문에 군대에게 줄 돈이 모자라서 동맹시의 토지 일부를 몰수할 정도로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만약 크라수스가 살아서 옥타비아누스를 도와줬다면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대로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아그리파를 능가하는 원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그의 정치적 감각이나 포지션으로 미뤄보아도 자기 명운을 카이사르 암살파, 안토니우스, 키케로에 걸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크라수스는 원로원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이유는 물론 스파르타쿠스 토벌전의 공을 원로원이 씹어버렸기 때문. 더구나 원로원파는 크라수스 본인의 라이벌인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으므로 더더욱 원로원파보다는 카이사르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다 카이사르와는 사이도 좋은 편이었고.][* 특히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설령 초반에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했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더라도 나중에는 옥타비아누스로 갈아탔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돈과 세력이 모자란 쪽은 옥타비아누스고 그에 비해 로마를 지배하던 쪽도 옥타비아누스였기 때문. 그에 비해 안토니우스는 부유한 동방을 차지하고 이집트 왕가의 후원까지 받고 있었으니 크라수스의 도움따윈 그리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재능이 야망을 따르지 못해 파멸해버린 전형적인 유형이 바로 크라수스이다. '''총평하자면 다른 라이벌인 [[폼페이우스]]는 군재는 뛰어났지만 정치력이 부족하고 [[카이사르]]는 정치력과 군재가 모두 뛰어났고 [[크라수스]] 본인은 정치력은 뛰어났지만 군재가 부족한 것이다.''' 그의 둘째아들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갈리아 원정에서 활약하여 "[[솔개]]가 [[매(조류)|매]]를 낳았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아버지보다 여러모로 낫다고 평가받았는데, 여기서 또 한번 고대 로마인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뛰어난 재력을 바탕으로 한 자선 사업으로 로마 사회에 꾸준히 기여하면서 원로회에서의 정치력 역량도 돋보여 끝내 삼두정치의 일각을 차지했던 위대한 인물보다 갈리아 원정에서 여러 전공을 세운 그의 아들을 더 우위에 놓았다는 기록은 당시 로마인들이 어느정도로 전공을 중시하는 풍조였는지 상상해볼 수 있게 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아들조차 역시 아버지를 따라 파르티아 원정에 종군하다가 [[카르헤 전투]]에서 전사했다.[* 다만 그가 이끌던 갈리아 기병 1000명으로는 파르티아군의 대규모 기병을 이길 수 없었고, 그나마 규모가 비슷한 카타프락토이도 마갑을 충실하게 갖췄을 정도로 무장 및 전투력에서 갈리아 기병들에 비해 우세한 상황이었다.]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함께 카이사르에게 총애받았던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